히어로는 아닙니다만

서울경제 신문 기고

박일준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한 제약회사가 있다. 향토 기업으로 지역 발전을 일군 유지로 꼽힌다. 진통제가 주 생산품목인데, 어느 날 마약 성분의 알약을 발견한다. 욕심이 생긴 연구원들은 자체 냉동창고에서 신종 마약을 제조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재벌가 아들에게 일부를 상납하고, 나머지를 지방검찰청 검사, 조폭들과 손잡고 거래를 시작한다. 회사의 오너는 지역의 시장과 결탁해 바이오 단지를 짓고 그 이익을 챙기려 하지만, 마약 제조, 유통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회장과 검사는 마약 제조, 운반책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는데 ...

TV 드라마의 스토리 일부다. 실제 이런 기업은 없다. 하지만 매운 맛 시리즈물이나 영화가 보는 우리 기업의 상당수는 괴물이고 빌런에 가깝다. 기업인은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나쁜 짓을 서슴지 않고, 기업의 사적 이익 앞에 사회의 공익은 없다. 실제 그럴까? 일부 기업인의 일탈도 있지만, 기업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에 일자리를 제공하고 수익이 나면 일정부분 세금을 내서 정부가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데에 보탬이 되게 한다. 사업보국인 셈이다. 실제, 대한상의 연구에 따르면 이해 관계자에 대한 우리기업의 경제적 가치 분배율은 기업 수익의 60%에 이른다.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기업의 투자유치를 위해 ‘땡큐’를 연신 외친 이유다.

그런데 최근 사회적 문제 해결에도 기업이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국민들의 요구가 커지고 있다. 기후위기, 저출생, 지방소멸 등 일견 우리 기업 본연의 역할과는 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회문제들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경제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돼 있고 종국에는 우리 기업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업들도 자신들의 기술이나 기업문화를 통해 사회적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이해관계자들 공동의 이익을 확대하고, 환경과 근로자, 지역사회를 위한 고민인 것이다. 대한상의 신기업가정신 협의체(ERT)의 출범도 이 같은 노력 중 하나다. 기업이 사회문제에 눈감지 않고, 함께 관심 갖겠다는 취지다. 2년전 76개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전국 1,550개 기업이 동참을 하고 있다.

현대차는 소방관들에게 회복지원버스를 제공했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6만7천명의 소방관들을 위해 세계 최고 수준의 수소전기버스를 제공하고 국민들이 응원하면 소방서마다 커피차도 보낸다. SK는 가정 밖 청소년들을 위해 ‘청소년 마음건강 지킴이’버스에 본격 시동을 걸고, 행복 도시락을 배달한다. 롯데는 폐교를 활용해 지역에 유일한 공공키즈카페를 만들어 내고, 두산은 정부지원이 미치지 못하는 가족돌봄 청년에 발벗고 나섰으며 LG도 소아암 어린이 가족을 위한 쉼터를 늘리고 있다. 기업들이 공공의 영역에서 미처 다 채우지 못한 사각지대를 메우고 있는 셈이다.

기업인의 잘못된 일탈은 처벌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기업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나 오해는 없어야 한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사회를 향한 소통과 노력에 대해 정당한 박수와 격려를 보내는 풍토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